超人의 안식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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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명록/공지사항 - 110103 망상-life

 
[이 곳은 핫바지 소년 문학 작가 쵸인의 안식처입니다]
그대여, 명심하시오.
사람은 양파와도 같은 것이니, 일면만을 보지 않을 것이며,
모든 것은 종이 한 장 차이이니, 농담을 진담으로 여기고, 진담을 농담으로 여길 것이며,
여자는 짓붉은 장미 한 송이와도 같은 것이니, 익살과 냉철함을 겸비할 것이니,

그대여, 이 곳을 거닐 때에는 주의하시오.

* 이 공지사항은 방명록의 기능을 겸하고 있습니다.
* 인장을 그려주신 아오이치 님, 천재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림자 기사단 1-7 Novel

# 11:28 pm, 9월 18일 알반 헤루인, 이멘 마하 주점 베안 루아 메인 홀

 본래 대부분의 주점들이 그랬고, 특히 분위기있는 곳으로 명성이 자자한 베안 루아의 경우 저녁 8시부터 가게 안이 혼잡해지기 시작한다. 저녁 식사가 모두 끝난다거나 혹은 하루 일과가 모두 끝나고 난 뒤에 베안 루아를 찾는 손님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무대에서 흘러나오는 우아한 재즈와 함께 아무 데이블에나 앉아 칵테일을 한두 모금 들이키면서 정신 없었던 하루를 정리하고 긴장을 풀곤 하는 것이다.
 11시를 넘긴 지금 정도면 이미 베안 루아 안의 테이블 대부분은 만석. 각자각자가 술잔을 잡고서 구구절절 이야기들을 나누느라 정신이 없다. 다만 분위기 자체가 비교적 격식있는 곳이었기에, 소란스럽게 떠든다든지 그런 손님은 없다.
 리온은 이렇게까지 늦은 시각에 베안 루아에 와보는 것은 처음이기에 말없이 주변을 가만히 감상하고 있었다. 잠시 무대의 음악이 멎은 사이, 몇몇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bar)로 향하거나 화장실을 가거나 하는 모습 따위가 보인다.

"야, 밀레시안."
"…어?"
"좀 아무 말이라도 하지 그래? 바로 옆에 사람들을 놔두고서 그렇게 두리번거리기만 하면 무지무지 무안해진다구."

 루이스가 불쑥 말을 건다. 루이스는 이미 다 마셔서 비어있는 물잔을 손가락으로 돌려가고 있었는데 자신이 지루하다는 것을 매우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제법 큰 원탁에는 겨우 루이스와 리온 뿐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헬레나가 보이지 않네. 아까까지만 해도 있었던 거 같은데."

 무서운 기세로 리온에게 배게를 던져댔던 헬레나는 어쩐지 방금 전부터 보이지 않는다. 리온은 그런 말을 하면서도 조금 전까지 별실에서 있었던 낯뜨거운 해프닝…이 생각나면서 얼굴이 화끈거리는 느낌이다. 물론 모두 다 연출된 것이라고 방 안에 있던 루아와 나오가 깔깔 웃으며 덧붙였지만… 다시 생각해 봐도 정말 무안해지는 광경이다. 다만 헬레나가 왜 버럭 화를 내고 나가버렸는지 리온은 도통 감이 안 잡히는 눈치였다.

"……, 아가씨가 어딨는지는 별로 궁금해 하지 않아도─ 우왓?"

 루이스가 입이 삐쭉 나온 채로 이야기를 하던 중 루이스의 앞으로 불쑥 넓은 접시가 나타났다. 접시에는 사과, 오렌지 등의 과일들이 이쁘게 썰어져서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또 연이어서 땅콩, 호두 등의 견과류가 종류 별로 놓인 접시도 등장했다. 접시를 쟁반에서 내려놓고 있던 것은 루아였다.

"오랜만이야, 루이스? 꽤 즐거워 보이네."
"루아 언니…! 이게 다 뭐… 뭐 내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다 이럴 때 모이는 거지, 김에 우리도 좀 쉬자구."

 루아의 뒤에서 제법 무거워보이는 물건을 들고서 나오가 나타났다. 얼음으로 가득 차 있던 버켓 두 개에는 각각 와인으로 보이는 병이 두 개 들어있었다. 나오는 버켓을 식탁에 올려놓고는, 허공에 손을 휘릭 하고는 휘저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와인 잔이 서너 잔 생겨났다. 소환 마법을 쓴 모양이다.

"와, 와인…"
"리온은 이런 거 처음 마셔보지? 이거 나름 맛있는 와인을 골라 온거야. 뭐 루카스 씨가 엘리네드 양조장과 친한 덕분에 이런 와인이야 구하기 쉽지만 말이지."

 나오는 와인 병에 적힌 '엘리네드 양조장' 마크를 강조했다. 와인을 멍하니 쳐다보는 리온에게 나오가 와인 잔을 건넸다. 루아도 나오도 테이블에 앉아서 무대를 응시한다. 무대를 등지고 앉았던 리온은 살짝 찡그린 루이스의 표정을 의식하고서야 무슨 일인가 하고 무대를 돌아다 봤다. 무대 위에는, 그러니까 무대 바닥에 고정된 긴 마이크 앞에는 헬레나가 서 있었다. 초콜릿 색깔의 차분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루아의 옷처럼 자극적인 옷은 아니었지만, 헬레나는 그녀 나름대로 이목을 끌고 있었다. 피아노의 건반이 저절로 눌러지면서, 장내에 블루스 풍의 슬픈 멜로디가 흐른다.

"루이스, 어때? 헬레나 노래 잘하지? 좋게 좀 봐 줘~"
"…… 그거랑은 별개에요. 밤무대라니, 아가씨 품격에 안 맞아. 아가씨도 참."
"어머, 밤무대라니? 이곳은 꽤 격식있는 곳이라구. 이멘 마하의 높으신 분들도 이곳에 자주 온단다."

 루이스는 헬레나가 노래를 부르는 것에 대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하긴, 리온에게도 헬레나가 베안 루아에 출입을 한다는 사실 자체도 꽤 놀라운 일이었기에, 무대에 헬레나가 있는 것을 보고 리온은 제법 놀라웠다. 그래도, 따지고 보면, 헬레나 본인도 원하고 있기에 저 무대에 서는 것이겠지. 그리고 노래를 부르는 헬레나의 표정은 제법 진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의 목소리는 제법 아름다웠다.

"그러고 보니… 키홀…씨는 어디에 있나요?"

 리온이 문득 생각나서 주변에 물어본다. 도서관에서 탈출하기까지 신나게 칼을 휘두르던 키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잔에 와인을 따르던 나오가 대답을 해준다.

"키홀은… 지금 아마 별실에서 자고 있을 거야. 고대의 마법은 생각보다 강력한 힘을 필요로 하거든. 한번 쓰고나면 몸이 버텨나지를 못할거야. 특히나 키홀은 아직 어리니까…"
"고대의 마법…?"

 리온이 단어를 되내인다. 이름에서 벌써 무시무시한 느낌이 베어져 나오지만 당연하게도 자세한 것은 알 리가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키홀이라는 사람은 꽤 힘이 센 모양이다. 전설 상의 키홀은 정말 허약한 요괴에 불과했지만서도…

"그…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루이스가 조심스럽게 말한다. 나오와 루아, 리온까지 모두가 루이스를 돌아본다. 아까부터 루이스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뭔가에 불안해하는 눈빛과 함께. 모두의 시선을 의식하는지 살짝 머뭇거리면서 말을 잇는다.

"아까 도서관에서… 아가씨는 뭘 하고 있었던 거지?"
"그러고 보니… 싸움이 벌어지고는 있었지만 우리는 영문도 모르고 있었구나."

 그제서야 리온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정황도 잘 알지 못한채 어쩌다 보니 베안 루아까지 오게 되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상당히 큰 의문이 생겨난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예정에도 없이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갑자기 리온은 혼란스러워지는 느낌이었다. 헬레나와 키홀, 그리고 엘라하라는 이름의 의문의 사나이… 리온이 알지 못하는 사정이 엮여져 있는 듯한 모양이다.



"…궁금한가?"

 갑자기 굵직한 목소리가 루이스의 등뒤에서 들려왔다. 순간 헉 하고는 루이스가 화들짝 놀라서 뒤를 돌아다보자 거기에는 우람한 체형의 걸걸한 느낌의 남자가 서있었다. 어깨까지 긴 머리와 제법 거칠어보이는 인상은 꽤 야생스러운 느낌을 풍겼다.

"어라, 점장님? 오셨어요?"

 루아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남자의 품에 와락 안긴다. 남자는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씨익 웃으며 루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남자는 나오와 루아 사이에 있는 자리에 앉았다. 나오가 잔에 와인을 따라서 남자에게 건네자 나오에게도 웃으면서, 한 모금을 들이켰다.

"소개가 늦었군… 베안 루아의 주인이지. 루카스라고 한다. 자네가 리온… …밀레시안이로군?"

 루카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리온을 응시했다. 리온은 뜻밖에도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건네자 놀란 모습이었다.

"그래, 이 곳은 어떤가? 좋은 곳이지, 안 그래?"

 루카스가 주위를 스윽 둘러보면서 리온에게 물었다. 괜히 리온도 덩달아 주변을 쳐다보게 됬는데, 마침 그때 헬레나의 무대가 끝났는지 손님들 중 일부가 박수를 쳐댔다. 헬레나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무대 뒤로 사라졌다. 무대의 조명이 약간 어두워지면서, 무대에 몰렸던 집중은 다시 테이블 곳곳으로 돌아갔다.

"보아하니… 지금의 상황이 꽤 혼란스러운 모양이군? 뭐, 차차 알게 될 터, 조급해할 필요는 없어. 사실, 자네와 이렇게 만나게 될 날을… 정말 오랜 시간동안 기다려 왔지. 그래, 오늘이야말로 시작이라고 해야겠지."


# ??:??, 9월 18일 알반 헤루인, ???????

"면목이 없습니다, 누아자 님."

 온 방안이 어두운 가운데, 원탁 위에 놓인 수정구슬만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누아자는 고개를 숙이고 서있는 엘라하에게 눈길도 주지않고는, 그저 수정구슬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앉아있을 뿐이다. 마나난이 말했다.

"너무 풀이 죽을 것 없다. 더구나 이번 미션의 목적은 밀레시안의 생포가 아니였으니까. 너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키홀 녀석을 도발한 것은 저의 독단입니다. 처벌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신경 쓸 것 없어. 그만 나가서 쉬도록 해."

 마나난의 말이 끝나자 엘라하가 다시 목례를 하고는 방에서 사라졌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다가, 누아자가 입을 열었다.

"…실패로군."

 누아자가 수정구슬을 보면서 말했다.

"약삭빠른 「쉐도우 오더」놈들을 끌어내는 데에 겨우 성공했나 싶더니, 결국은 이렇게 됬군. 애초에 이 미션은 밀레시안의 능력을 모니터링하기 위함이었거늘. 거기다 세간의 눈길을 끌어버리기까지 했으니, 한동안은 소동을 피우기 어려울 거다."

 리온 일행이 멋지게 도서관을 탈출하고 한 5분 정도 지났을까, 예정했던대로 팔라딘 기사단이 도서관을 포위했다. 던바튼 마법 학교 전체가 발칵 뒤집혀 소동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팔라딘 기사단은 일은 일대로 크게 벌려 놓고 수확도 없이 마법 학교 학생들의 온갖 욕만 바가지로 얻어 먹고 철수하게 되었다.
 누아자가 무심하게 마나난에게 물었다.

"그래서, 지금 그 밀레시안은 어디에 있지?"
"뭐, 당연한 것이지만, 그들의 아지트에 있다."
"베안 루아인가…"

 누아자가 수정구슬을 응시한다. 무슨 주문을 건 것도 아닌데 수정구슬은 누아자의 바람을 읽은 듯 베안 루아 안의 풍경을 홀로그램으로 공중에 표시한다. 홀로그램에는 루카스와 대화를 나누는 리온의 모습이 나타났다.

"흐흥, 아직 기회는 있다. 지금부터가 시작이지."

 누아자가 기분나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림자 기사단 1-6 Novel

# 7:12 pm, 9월 18일 알반 헤루인, 던바튼 시립 마법학교 마법 도서관


 날카롭게 부딪히는 금속의 파열음이 책장들 사이사이로 퍼져나간다. 번쩍거리는 섬광이 쉴 새없이 팅겨져 나온다. 두 검날은 서로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양 빈틈없이 부딪혀댄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사이에서 키홀이 가벼운 꾀를 내본다. 옆을 보지도 않고 책장으로 손을 뻗어 책 서너 권을 엘라하를 향해 집어 던진다. 시야를 가리는 동시에 주위를 잠깐이나마 돌려보려는 속셈이리라. 그러나 엘라하는 개의치 않는 듯 더스틴 소드를 휘둘렀다. 허공을 가른 더스틴 소드는 날라온 책 더미들을 토막토막 양단해버린다. 이 틈을 타서 키홀이 바스타드 소드를 쐐기를 박듯이 크게 뻗는다. 정면으로 다가온 바스타드 소드를 엘라하가 측면으로 민첩하게 피하고 카운터를 날린다.

"키홀, 진정해! 저녀석은 지금 시간을 끌려는 거잖아! 곧 있으면 팔라딘 기사단이 여기로 올 거라구!"
"알고… 있다… 약 3분 20초 정도 뒤면… 우리가 있는 이 C 책장 근처는 모조리… 포위된다…"

 헬레나의 다급한 외침에 키홀은 헐떡거리면서도 차분한 어조로 답한다. 즉 이 상황의 모든 변수를 모두 염두해 둔 채로 대결에 임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키홀은 칼질을 멈추고는 엘라하의 눈치를 본다.

"알고 있으면서, 대체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려는 셈이야?!"
"…그러고 보니, 도서관 안내 시스템이 지금은 꺼져 있지…"

 헬레나가 걱정스러운 외침을 날린다. 리온이 읊조린 그대로다. 도서관 안에 깊숙하게 들어와있는 지금 이 상황에서 자력으로 도서관 입구까지 나간다는 것은 백사장에서 바늘 찾는 격이다. 그런데 지금은 도서관 안내 시스템이 고장난 상태. 즉 키홀이 언급한 3분 20초 이내로 도서관 밖으로 포위망에 걸리기 전에 빠져나간다는 것은 불가능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키홀은 무슨 물리 법칙을 어기는 신비한 마법이라도 알고 있기에 저렇게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엘라하 이자식."
"하, 슬슬 상황 파악이 되시나? 그렇게 나를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양이지만, 죽는 건 너희들이야."
"과연… 그럴까?"

 키홀이 엘라하를 여전히 응시하면서, 두 손을 모으고 주문을 외운다.

"다르가 셀림 메데르 다우 사비…"

 키홀의 주문이 읊어지기 무섭게, 키홀을 중심으로 크게, 바닥에 검은색 원이 그러졌다. 형체가 없는 듯이 느껴지지 않는, 꽤나 기분나쁜 원이었다. 그 원은 키홀을 포함하여 리온, 헬레나, 그리고 루이스 모두를 커버하여 그려졌다. 엘라하는 아직 아무 영문도 몰라 빤히 쳐다보고만 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설마, 고대의 마법?!"
"날 능욕한 댓가… 얼마 가지 않아 치르게 될 것이다."

 키홀이 엘라하를 보며 씨익 웃는다. 로브 아래에 그늘진 얼굴에 지어진 차가운 웃음에 엘라하가 움찔 한다. 그러는 사이, 검은 원은 리온을 포함한 일행들을 모두 잠식해 나갔다. 리온의 몸 위로 검은 기운이 감싸오르기 시작한다.

"이 이게 뭐야!"
"꺄아악! 키홀! 이게 무슨 짓이야!"

 놀라서 소리를 질러대는 헬레나도, 당황하여 바둥거리는 리온도, 키홀도 루이스도 모두 검은 기운에 먹혀들어 사라져갔다. 곧, 도서관 내부 C구역에는 엘라하 혼자만이 남게 되었다.

# 6:44 pm, 9월 18일 알반 헤루인, 던바튼 시립 마법학교 본관 로비

"이거이거, 너무 갑작스러운거 아닙니까?"

 천연덕스러운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시간이 시간이다보니 본관에는 인적이 없다. 혹시나 있을 수 있는 학생들을 배려하기 위해서 넓은 간격을 두고 형광등이 복도를 밝혀주고 있었다.

《상부의 명령이다. 내 탓을 하지 마라. 너도 명령이니 그냥 따르면 될 것 아니냐.》
"그건 그렇지만서도 이건 좀 아니지… 이렇게 큰 움직임이 있을 거였다면 사전에 이야기를 해주는 게 예의지 않습니까? 우리가 무슨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불과 30분 전 정도에 하달된 명령이었고 모조품 성배를 급조하느라 우리도 정신이 없었다.》
"하여튼… 다음부터는 좀 봐 달라구요. 내 입장도 좀 생각을 해줘야지 참."
《알았다. 어쨌든 현장에서 이탈해라. 곧 놈들이 움직일 것으로 예상된다.》

 삑. 대화가 끝나고, 남자는 거칠게 핸드폰의 폴더를 닫아 주머니에 쑤셔넣는다. 남자는 한숨을 푸욱 쉬더니, 건물 밖으로 나갔다.

# 11:16 pm, 9월 18일 알반 헤루인, 이멘 마하 주점 베안 루아

 마치 반호르 탄광의 롤러코스터라도 타고 내린 것처럼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리온은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 눈을 뜨는 데에 성공했다. 눈을 뜨자마자 발견한 사실이 있다면 상당히 익숙한 분위기가 느껴졌다는 것이다. 짙은 빨간 색의 천장, 벽지, 그리고 침대, 배게…… 아니 잠깐 빨간 침대?

"여, 여, 여, 여기는 어디야!!"

 찬물이라도 끼얹여진 것처럼 리온이 벌떡 일어난다. 당혹스러운 느낌 그대로, 그의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여기는 베안 루아 안에 있는 룸이다. 즉, 술자리에서 분위기가 달아오른 커플들이 그렇고 그런 작업을 행하기 위해 2차적으로 오는… 아무튼 리온은 자신이 그런 장소에 있다는 사실이 당황스럽기 그지 없었다.

"나, 나는 분명, 바, 방금까지 도서관─"
"어라, 일어났구나? 귀염둥이."

 불안해하는 리온의 뒤로부터 낯선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리온이 매우 경직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자, 주변의 새빨간 풍경과 매우 조화가 이루어지는 새빨간 머리의 미녀가 룸의 입구에 서있었다. 새하얀 피부에 빨간 눈을 가진, 거기다가 가슴골이 보일랑 말랑 하는 시스루 드레스를 입은 매우 매혹적인 미모의 여자였다. 가뜩이나 굳어져 있었던 리온은 정말 얼어버리고 말았다.

"저, 저기, 무슨 일로?"
"어머, 자기, 그렇게 말하는 거 아냐. 자기 일어나기까지 내가 꽤 기다렸다구? 한 1시간… 정도?"
"무, 무슨 소리에요, 그게!"
"무슨 소리이긴… 오늘 자기가 나한테 잔~뜩 서비스 해주기로, 저번에 기억 안 나?"

 매우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이 미녀는 리온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느릿느릿 침대 옆에 다가가 리온 옆에 앉았다. 다만 리온은 자기가 그런 말을 한 기억도 나지 않았고, 심지어 이 여자를 만난 적이 있나 싶은 생각도 들어왔다. 아니, 애시당초 생판 누군지도 모르는 여자가 이런 말을 하니 당황할 만도 했다.

"내, 내, 제가, 그런, 말을 했, 었다구요?"
"아이~ 참. 나, 오늘 밤만을 줄곧 기다려왔는데."

 리온이 눈치도 채지 못하는 겨를 동안 여자는 머리 뒤에 꽂은 머리핀을 풀렀다. 그녀의 윤기가 흐르는 적발이 어깨가 드러난 상반신에 흘러내렸다. 그녀는 서서히 리온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다가가던 찰나였다.

"잠깐, 루아!! 또 뭐 하는 거야?!"

 익숙한 목소리에 왠지 마음이 놓이는 리온이었다. 눈앞에 절박한 상황에 한 줄기 구원의 빛이 비춰지는 순간…이었다고 리온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어지는 루아의 목소리는 제법 그늘졌다.

"…쳇, 한참 즐거워지려는 순간이건만."
"뭐가 어쩨? 일어나면 당장에 데려오라고 내가 말.했.잖.아!"

 룸의 입구에 쳐져있는 커튼이 확 제껴지면서 나타난 것은 헬레나였다. 아까 전의 교복 차림 그대로, 제법 화가 난 듯한 모습이었다. 가늘게 떨리는 숨소리와 함께 헬라나는 무서운 눈빛으로 루아라고 불리는 이 미녀와 리온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뺵 소리를 지른다.

"이, 이, 이, 리온 이 변태!!"

 그러더니 어디서 났는지 빨간 배게를 냅다 리온에게 던져댄다. 무방비 상태로 강력 배게 어택을 맞은 리온은 그대로 침대 아래로 굴러 떨어져서 바닥에서 뒤로 한바퀴 구른다. 바닥에 카페트가 깔려 푹신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뒤통수가 꽤 아팠을 터였다.

"헬레나, 너무 화내지 말아. 루아가 장난친 것 뿐이잖아?"
"나오! 너는 너무 루아한테 관대해. 조금 쓴소리도 해주면 좋잖아?"

 헬레나의 옆으로, 또다른 인물이 나타났다. 방금 나오라고 불린 이 여성은, 루아와는 또 다른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빨간 머리가 매우 원색적이고 정열적인 느낌의 매력을 풍겼던 루아와는 달리 나오는 트윈테일로 땋은 양갈래 흰색 머리가 매우 편안한 느낌을 풍겼다. 검은색의 차이나 드레스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루아한테 맘에드는 남자가 생기면 줄곧 있는 일이잖아?"
"마, 마, 맘에 든다고?!"

 나오의 말을 듣더니 헬레나가 크게 당황스러워한다. 그러곤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또 리온과 루아를 번갈아 보더니, 토라진 표정을 짓고는 룸에서 나가버렸다. 쓰러져서는 일어날 생각을 않는 리온에게 나오가 다가간다.

"좀… 괜찮아?"
"아니… 별로 아닌 것 같아요…"

 리온이 힘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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